카메라타 서울 SNS/음악지 칼럼

첼로와 베짱이

Conductor 2007. 5. 27. 19:27

서울스코프 5월호 최영철의 음악이야기

"첼로와 베짱이"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 연주에는 연미복을 입는 것이 어떻겠냐는 동료 클라리넷 선생의 제의다. 내가 꼬리 달린 연미복 대신 턱시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전번 연주회 때에 대기실에서 연미복을 잃어버리고는 새로 장만한 옷을 입고 싶은 모양이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연미복에는 나만의 잊지 못할 사연이 있다. 옛날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보았던 "개미와 베짱이" 의 우화다. 그 때의 기억은 베짱이가 여름 내내 연미복 차림으로 첼로를 켜면서 즐기고 개미는 땀을 흘리며 일을 한다. 추운 겨울날이 오고 베짱이는 오돌오돌 떨면서 고픈 배를 부여잡고 개미의 집을 찾아가 동냥을 한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참 안되기도 했고 일 안하고 여름 내 놀다가 당연하지 하면서도 저 베짱이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첼로를 전공하게 되면서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의 그 우화가 자주 연상되었었고, 전문 첼리스트로 활동하면서부터는 그 옛날 베짱이가 입던 꼬리 달린 연미복까지 입게 되었으니!
분장실에서 연미복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베짱이의 첼로가 연상되어 은근히 연미복을 기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우화 덕분에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겨울날 갈 데 없는 베짱이는 되지 말자는 다짐이 생겼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바로 개미와 베짱이를 같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다짐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도 하고 활동도 하면서 항상 겨울이 닥칠 때의 대책을 생각했었다. 그 미래의 대책 중 하나가 인터넷 상의 활동 무대였고, 지금 그 무대를 현실화 해 가는 작업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첼로 아카데미를 열고 첼로와 연주에 관한 정보들을 올리면서 옛날의 베짱이를 또 생각해 본다.

한참 활동하던 때 나는 첼로만 하면 베짱이의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복수 전공으로 지휘도 택했었고 오케스트라를 창단, 여건이 닿으면 기회 있을 때마다 무대에 선다. 남들은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활동하면서 살아가는데 유독 나만 이것저것 건드리는 것 같아 남이 주책스럽게 볼까 걱정도 되지만 나로서는 그 옛날의 베짱이 꼴이 나지 않으려는 하나의 몸부림인 것이다. 실제로 동료나 선후배들을 가끔 만나면 무슨 일을 그렇게 쉬지 않고 만들고 다니냐고 한다. 그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일이 쫓아와서 할 수 없이 하는 거지, 내가 만드는 건 아니야."
거기다가 장황하게 베짱이 얘기를 한다면 요새 말로 "썰렁" 해질 테니까.

어쨌든 인터넷 상으로 첼로와 첼리스트들의 정보를 제공하며, 연주회와 여러 유익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서로 좋은 정보를 교환할 때에 개미의 역할 또한 다했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 때에는 추운 겨울이 닥쳐도 따스하게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부드러운 첼로의 선율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한국첼로학회장 / 최영철


2004.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