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타 서울 SNS/음악지 칼럼

가을의 한 가운데 서서...

Conductor 2007. 5. 25. 20:16

깊어가는 가을녘 고요한 이른 아침, 새벽별과 스러져가는 달 밑에서 나무 담장 앞에 처절하도록 노랗게 피어있는 국화를 보았다.
가을은 짧게 지나가 버린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맑고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어느 샌가 찬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산골마을의 귀뚜라미들도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한여름 그렇게도 짙푸름을 뽐내던 나무들도 점차 황갈색 잎으로 바뀌어 가면서 곧이어 다가올 겨울을 앞두고 서서히 흙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국화, 그중에서도 흙색을 닮은 노란 국화는 가을에 걸맞은 꽃이란 생각이 든다.
가을은 모든 게 투명해진다. 자연이 그렇고 우리의 정신도 새벽 별빛처럼 초롱초롱 맑아진다. 사색하기에도, 책을 가까이 하기에도, 가을밤의 맑은 정기는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진지하게 다가온다. 달빛이야 어느 때라고 그 투명하기가 덜하지 않겠느냐마는 냉랭한 가을 밤기운에 그 빛은 처절하도록 맑고도 밝다.

결실의 계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무얼 심었고 무얼 뿌렸는지 거두고 결산해야 할 시기가 왔다.
잘 심었으면 반드시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열매 없는 흉년이 들 것이다. 사업을 잘 했으면 풍부함이 따를 것이고, 자식 농사를 잘 지었으면 부모의 영광이 될 것이고,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평화를 심었으면 평화를 거둘 것이고, 분쟁을 심었으면 분쟁을 거둘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는 좋은 사회, 좋은 나라 만들자는 구호가 요란하다.
그러나 이 작은 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심은 것이 분쟁이라면 계속 대대로 분쟁으로 치달을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지금 우리부터라도 평화를 심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 후대에 뿌리 내릴 것이다. 모로 가는 게가 남 보고는 똑바로 가라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음악계의 결실을 보자.
빠른 결실을 원해 속성 재배한 교육이나, 기본은 없이 얼추 맞추어진 연습 등은 부실한 결과를 맺었을 것이고, 예술의 기나긴 여정을 무시한 결과로 한 순간의 성과에 만족하고 이름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음악인과 단체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지금도 우후죽순같이 계속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있다. 처음 순간에는 산을 옮길 듯이 기세충천하다가도 어느날 보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인류나 사회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베어버릴 수밖에...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이러한 열매는 타인에게 매우 불행한 결과를 안길 수도 있다. 특히 영향을 끼치는 자리에 있는 인사나 단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찬란한 말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 다행히도 그 옳고 그름과 유무해를 가려낼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이 있으니 무슨 말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단체든 그 역사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객관적인 판단조차 못하게 뒤넘이질 치는 세상이 문제이고, 그래서 이 가을이 더욱 절실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무슨 여러 말이 필요 있는지? 지금의 열매가 각자 심은 결과 아닌가?
불확실한 미래 운운 하지만 지금 심는 그대로 앞으로도 맺을 것인데, 아직도 화려한 환상에 젖어 있다면 심각한 중증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고요히 자기 본분 다하며 노랗게 피어 있는 국화나, 가을밤 우리 심금을 울리는 귀뚜라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들이여! 그대의 본분들은 다하고 있는지, 올해는 무슨 유익한 열매를 맺었는지?
그들의 열매는 엄숙하고 숙연하게 바짝 우리에게 다가온다.

심을 때는 같이 심었으나 누우런 황금빛으로 화한 들녘에 충실한 열매를 맺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알곡과, 여름 내내 알곡의 충실한 결실을 방해하며 휘젓던 쭉정이 가라지들의 차이가 결실기에 도달하자 그렇게 크게 달라질 줄이야!
말없이 고개숙인 충실한 알곡은 곳간에 들여지고, 쭉정이 가라지는 곧 불에 태워져 바람에 날리우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른 새벽 가을의 맑디 맑은 투명한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충실한 열매를 맺었나 다시금 헤아려 본다.
새벽 냉기를 듬뿍 담은 허허로운 바람이 아직 얇은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네... 


음악교육신문 칼럼

'카메라타 서울 SNS > 음악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첼로와 베짱이  (0) 2007.05.27
“예술가 백혜선을 생각한다.”  (0) 2007.05.27
"會者定離”  (0) 2007.05.25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0) 2007.05.25
어디서 일성호가는...  (0) 2007.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