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대를 지나다 보면 알퐁스 도데의 소설이 떠오른다. 지금도 웬만한 분들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마지막 수업” 을 기억할 것이다.
그 날도 여느 날과 같이 학교에 지각하게 될 듯하여 나는 서둘러 들판을 가로질러 학교로 갔다. 다른 때라면 왁자지껄할 교실이 오늘만은 조용하였다. 선생님에게 꾸중 듣는 것이나 아닐까 하여 겁먹은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자리에 앉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정장 차림을 하고 교단에 서 계시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교실 뒤쪽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베를린으로부터의 명령으로 내일부터는 알자스와 로렌의 학교에서는 독일 말로만 가르치게 됩니다."
나는 그제야 선생님이 정장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학교의 교실 안에까지 들어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깨우침은 내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프랑스 말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굳센 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국민이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자기들의 국어만 유지하고 있다면 자기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수업이 끝나려고 할 무렵 프러시아군의 나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자 선생님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여러분, 여러분, 나는… 나는… " 라고 할 뿐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선생님은 흑판 쪽으로 돌아서시더니 "프랑스 만세!" 라고 썼다.
이제부터 필자가 고교 3년 시절, 국어를 담당하시던 담임선생님과의 이야기이다.
필자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수업을 받아야 했다. 음악을 전공하는 필자는 항상 연습시간이 부족해, 당시 국립교향악단원이시면서 각 대학에 출강하시고 계셨던 음악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음악 선생님께서는 담임선생님께 이 사정을 전하시며 하루 수업의 마지막 시간을 조정해 달라고 하셨다. 당시 필자는 운이 좋았는지 모 콩쿠르 성적으로 대학의 학업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인문계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우들과 같이 여러 과목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담임선생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음악 선생님께 재차 부탁을 드렸더니, 분명히 이 사정을 얘기하셨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지각을 하게 되어 교단 앞으로 불려나갔다.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며 교실 앞에서부터 뒤까지 밀고 가면서 때리셨다. 필자의 기억으로 그렇게 막무가내로 맞아본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맞으면서 바로 전에 음악 선생님께 부탁드렸던 내용이 화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과 억울한 마음보다도,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로 학우들 앞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때 학교 내에서는 매우 고매한 인격을 갖추신 선생님들이 여러 분 계셨다. 선생님께서도 그 분들 중의 한 분이셨고 국어 사랑에 평생을 바치셨던 외솔 최현배 박사의 직속 제자이셨다. 이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의 국어 말살에 대한 이야기며, 국어 사랑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셨다. 후에도 그 분들께서는 대학에서 많은 가르침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 시절 한 책상을 쓰던 송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송은 아역 배우로 시작하여 탈렌트로, 영화배우로 다재다능한 친구였다. 우리 반에서는 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학우들이 많이 있었고, 송과 필자도 그 일원이었다. 송은 순수 연극에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고 필자와 순수예술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었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며 지낸다. 송은 그 후 무모하리만치 순수 연극에의 도전을 계속하면서 실패의 쓴맛을 많이 경험하다가 무언의 퍼포먼스 “난타” 로, 한국 작품으로는 최초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며 외화 획득에도 한몫을 한다. 필자도 송의 브로드웨이 첫날 공연에 참석하여 대성공의 감격을 같이 맛보았다.
당시 선생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 중의 하나가 “下치 인생은 되지 말라” 와 학급의 급훈으로 내거셨던 “자기한테부터 이겨야” 이 두 말씀이었다. 송과 필자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말씀이다.
학급에서의 그 사건이 있은 지 한참 후에 어떤 일로 교무실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나오다가 필자는 뒤로 어렴풋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께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엄격하시고 딱딱하시던 선생님이 음악 하는 제자 자랑을 하시는 게 아닌가? 지금에 와서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 것 같다. 이제 막 무엇이든 시작하려는 제자에게, 앞으로의 기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심어주려 하신 것이다. 물론 그 선생님의 성품상 일신의 부와 명예에 대한 기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고3 시절이 인성과 전인 교육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교육계 전반에서 전인 교육과 인성 교육의 필요성이 각종 다른 논리에 의해 점차 사라지는 현실과 클래식 음악 교육도 상대적으로 점차 축소되는 것을 보며 전인 교육의 부재로 인해 발생될 앞으로의 암담한 사회 현상에 대해 자괴감마저 드는 건 필자만의 기우일까?
음악계에도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성과 전인 교육이 각 학생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누구나 선생이 되고 싶어하나 선생 된 자의 책임과 결과 또한 막중함을 깊이 상고해야 할 것이다.
음악교육신문 200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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