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명한 두 분의 행적을 보면 재미도 있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동시대에 살며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서로 정적으로서 번갈아 귀양을 가기도 한다.
무대는 인적 없는 남해의 고도 보길도이며 두 분의 자취이다.
제주로 칩거하러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쉬다 수려한 경관에 눌러앉게 된 고산은 멋진 고택과 세연정 등을 남기고, 관직이 삭탈된 우암도 역시 제주로 유배 가다 풍랑으로 인해 보길도에서 잠시 머물던 중, 임금에 대한 원망을 바위에 남겼다.
한양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낸 문인 고산은, 조직의 쓴맛을 떠나 멀리 보길도로 들어가 시조의 대가로서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룬다.
고산과 정적으로 매번 운명이 뒤바뀌던 우암은, 보길도 원망 글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한 분의 눈에는 같은 보길도라도 천당으로, 한 분의 눈에는 지옥으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역사인데, 매 시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초벌구이 인생들에게는 한낱 지난 역사에 불과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두 분 문인에 대한 역사적, 학문적 평가는 우리 세대 또한 겪고 있는 당파의 영향으로 다를 수 있으므로 말년의 기록만 간단히 비교하자면 이렇다.
한 분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으며 배 띄워라 노래하다가, 편안한 노후를 호랑이 없는 굴에서 왕 노릇하다 세상을 뜨셨고, 한 분은 임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다가 끝내 사약으로 인생을 마감하셨다.
두 분 다 당파의 풍랑이든, 바다의 풍랑이든 피할 수가 없었으나, 한 분은 긍정적으로, 한 분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후세의 판단이야 또 당파에 따라 다르니 거론할 필요가 없고...
세월이 흘러도 사람 사는 방식은 거의 같다.
음악계에도 이 두 종류의 삶의 방식이 존재하기에 서두가 길었다.
관직, 교직, 등 여러 조직 내에서 활동하는 이가 있고, 이 조직을 떠나 자유로이 자신의 음악을 펼치는 이도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대가들은 한결같이 후자의 경우인데,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실력이란 테크닉에 국한된 좁은 의미가 아니다.
우암도 당대 날리던 실력 있는 문인이었다.
전자의 경우, 매사 조직의 통제 하에서 급여도 타야 하고, 기금도 받아야 하는 한정된 사고를 벗어나기 어려운데, 이 또한 한시적이라 기한이 다하면 한양의 임금만 원망하며 바라봐야 한다.
만일 불행하게도 정적을 만났다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
고산이 예술적 역작을 남기며 말년이 편안했던 이유는, 누가 봐도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이, 창작이 타율에 매여 흐르면 이미 예술이 아닌 모방에 그친다.
모방의 끝은 허무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원망일까?
놓친 열차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타지 못했으니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신선경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뮤직투데이 칼럼 201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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