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기 2편
10월 15일
어제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는지 아침까지 푹 잤다.
호텔이 제공한 맛난 아침을 들고(일본의 밥맛은 참 좋아서 맨밥만 먹어도 맛이 있다.) 일행은 짐을 챙겨들고 나가사키 역으로 향했다.
후쿠오카 행 신간선 예매를 하고 짐을 맡긴 후 나가사키의 몇 군데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자유로 탈 수 있는 전철표를 끊으니 우리 돈으로 약 4600원 정도.
곧 오란다 언덕으로 향했다. 오란다 언덕은 옛 네덜란드인을 부르던 오란다에서 이름을 따서 지금도 오란다자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옛 외국인들이 살았던 저택과 공사관등의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산책코스나 데이트 코스로 인기 있는 지역이며 오우라 천주당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천주교 신자인 장 교수가 아마 오늘이 주일이라 기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우라 천주당은 팔각형의 탑신을 가졌으며 높은 곳에 세워져 돌층계를 올라가야 만날 수 있었다. 西坂의 언덕에서 순교한 26인의 성인들을 봉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회로서, 1864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발하는 아름다운 빛들이 마리아상을 장엄하게 비치는 경건하고 조용한 교회이다.
벽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또 다른 명소인 글로버 정원과도 인접해 있었으며,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로 중요한 관광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입구에서 표를 파는데 나중에 나와 보니 바로 옆이 출구이다.
출구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으나 아무도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국민들의 질서의식이 눈에 뜨이는 부분이다.
장 교수 말이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오백 원짜리 동전이 일본 자판기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자판기를 열어보면 거의 반이 한국의 오백 원 동전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동전을 들고 원정까지 왔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데지마로 향했다.
데지마는 1636년 일본 유일의 무역항으로 조성된 부채 모양의 인공 섬으로 당시의 역사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데지마 자료관이 함께 있다.
포르투갈인들과 네덜란드 상인들을 모아 놓고 살게 하며, 일본 최초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던 곳으로서 섬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 문호를 개방하며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안 우리나라는 쇄국으로 일관했으니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살았는지...
자국 이기주의, 외톨이 민족주의의 결과가 후손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본다.
신간선 기차 시간에 맞추어 마지막으로 원폭 투하 평화 공원을 찾았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거대한 하얀 빛이 작열하며 24만 시민 중에 15만 명이 사망했다. 11시 2분인 채로 시간이 정지된 시계, 변형된 유리병 등이 그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실의 1300점의 자료는 모두가 당시의 참혹함과 처참함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날 이후로 반세기, 영원히 한포기의 풀도 자라지 않을 거라는 이곳에 평화의 공원이 생겼고, 푸른 녹음과 울창한 나무와 벚꽃이 자리 잡았다.
공원 안 우람한 남성상인 평화기념상의 하늘을 가리키는 손은 원폭의 위협, 수평으로 내민 손은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북한의 원폭 실험에 온 일본 땅이 떠들썩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십여 년 전 일제 시대를 겪은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해방 되던 해 8월 18일,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애국지사들, 중요 인사들을 전부 처형하기로 하고 명단을 남산의 신사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인해 무조건 항복하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 애국지사들이 죽음을 면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신사탑을 부수다가 그 명단을 발견했으나 그 자료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 후 십여 년 전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 내용이 밝혀져 내심 충격을 더했었다.
만일 항복이 사흘만 늦었다면...
일본으로서는 원폭 투하로 애꿎은 백성들이 희생당했다고 애통해하지만 우리로서는 천우신조 아닌가?
우리나라 전래의 속담이 생각난다.
“남 잡이가 제 잡이”
신간선에 올라 도시락을 펼쳐들고 넷이서 먹고 있는데 차장이 와서 표를 검사한다.
일어로 뭐라고 하는데 각자의 자리가 틀리니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창가의 두 자리가 비어서 일행 중 두 사람이 앉았는데 그걸 지적하는 것 같았다.
장 교수는 못 알아듣는 척하고 있었고, 나는 내심 어떻게 나올까 떠보는 심정으로 영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일본인 차장이 영어가 나오니까 뭐라 얼버무리더니 얼른 그 자리를 떠난다.
우리는 도시락을 먹고도 자리가 비어 있어서 계속 앉아 있었더니 한참 후에 다시 와서 원래 자리를 가리키며 그리로 가라고 손짓한다.
역시 사회의 원칙에 매우 예민한 백성이구나 하며 자리를 옮겼다.
저녁에 후쿠오카에 도착해 역 근처 호텔에서 충남대 최완식 교수와 이병국 교수를 만나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후쿠오카의 전자상가를 들러 여러 컴퓨터와 전자제품을 구경했는데 어떤 물건은 한국보다 싸고 어떤 것은 조금 비싼 것 같았다.
저녁을 일본 화식으로 들고 강가에 있는 포장마차까지 걸어가 담소를 나누었는데 포장마차의 음식 값이 상상 외로 매우 비쌌다.
여러 가지 농 섞인 담소를 나누다가 내가 오래 전 일본의 온천장에서 생긴 일을 말했더니 장 교수가 설명을 한다.
혼탕에 들어갈 때에는 서로 간에 지키는 예의가 있고 물에 들어가서도 넘지 못할 선이 있단다.
그 때 나는 혼탕인지 모르고 들어갔었는데, 일본 여성들이 나중에 우르르 들어와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10월 16일 마지막 편으로 계속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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