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푸스의 신화(神話)는 계속된다
노력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인간사회의 일은 시초(始初)부터 결말(結末)까지 너무나 빤한 스토리를 수없이 재반복(再反復)하는 한쪽 바퀴가 고장 난 수레의 길고 긴 여정(旅程)이다.
그래서 그 통속성(通俗性)에 기가 질리고 너무도 지루하여, 누구든 수없이 그 고장 난 여로를 탈출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 숨이 턱턱 막히는 천박한 통속성은, 역사 내내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부를 쌓았는가?
누가 더 잘 났는가 등등의 끝없는 행진(行進)을 이어가는데, 교육자든 종교인이든 그 누구든 예외가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못하며, 그 지루한 여정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떼지 못한 채, 양들의 침묵(沈黙) 행진을 천형(天刑)으로 여기며 산다.
인류의 무분별한 생육과 번성은 지구의 감당 임계(臨界)치를 벗어나, 각종 질병과 환경재앙, 전쟁을 양산(量産)하였고, 과포화 상태의 사회는 고대 야생 상태의 살벌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게 되었다.
위정자들이나 사회의 리더 그룹들은 거대한 인간 수레가 자동적으로 서서히 그 한계점에 다가감을 알면서도, 대중의 육안(肉眼)을 현혹하며 하루하루를 급급하게 연명(延命)해나가는 것이 현 지구의 실상이다. 그들로서도 대책이나 대안(代案)이 없기 때문이다
임계점에 다다른 지구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용트림을 준비하며, 인간 사회를 압박하고 그 예후(豫後)는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간간히 있는 미래학자들의 발표는 대폭발의 시간적인 해석의 차이일 뿐이고...
인간사회는 이 가운데서 인간의 여러 삶의 목적 중, 사치스럽게 느껴지던 누가 높은가, 누가 부자인가, 누가 잘났는가의 과제는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가장 마지막 남은 문제인 원초적 삶의 연명이란 난제(難題)만 남게 된다.
삶의 연명이란 난제는 바로 최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입의 문제에 직결되는데, 이 수입이 현저히 저하(低下)되니 바로 정글의 법칙 하에 놓이게 되고, 이는 인간의 도덕적 문제나 의리,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벗어던지게 되었으며, 그 현상은 점차 세인(世人)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온다.
교육계의 대학 통폐합이나 문화계 교향악단 문제의 악순환 등, 지리멸렬(支離滅裂)하는 사회의 난제들도 모두 이 원초적 삶의 수입에 관해 파생(派生)된 문제들이다.
그러니 이 가운데서 기득권층에 속하는 안정된 직업군들은 위기의 사회에서 더욱 움츠러들며 방어적(防禦的) 태세를 굳건히 하고, 제도권 밖의 직업군들은 틈만 나면, 치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할 공격적(攻擊的) 태세를 다진다. 물론 곳곳에서 갑과 을의 사생결단의 위기감이 팽배(澎湃)한 이 사회의 부정적 산물이다.
문화계의 경우,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점은, 분명히 수입은 없는데 매스컴의 홍보에 더욱 의존(依存)하는 현상이다. 불경기로 갈수록 홍보를 더하려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불황을 숨기고 도리어 허세를 부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剝奪感)을 자극하는 모종의 유인작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숨은 내막과 의도는 이러하다. 여기가 잘 나가니 이리로 와서 투자(投資)하시오... 투자의 끝에 대한 책임이나 결말은 없다. 투자는 말 그대로 투자에 불과하다망하면 투자한 사람의 책임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적은 수입마저 허공(虛空)으로 날리고 만다.
문화계도 좌우에서 파산해가는 사람들을 점차 많이 발견한다. 도저히 일어날 희망도 없다. 하지만 빤히 보이는 결말인데도 버틴다. 내일은 나아진다는 자신만의 독백(獨白)이며 자기 최면(催眠)이다. 그런 사람들의 군상(群像)이 모여 있는 집단이니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허황된 위세로 위장하며, 타인을 속여 자신의 연명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 있는 사람들은 끌어안고 노출하지 않으며, 자신의 연명 도구와 처세술(處世術)은 철저히 숨긴다.
지구가 망해도 자신은 살아야겠다는 절박감(切迫感)도 내재되어 있고...
최소한 남들보다 오랜 시간은 버텨야 한다는 원초적 생존본능이기도 하고...사회의 천시(天時)를 보면, 그 시대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온갖 장밋빛 환상을 퍼뜨리며, 약한 인간 군상들을 유혹하는 기획자나 매스컴의 현란한 기술을 날마다 새롭게 접한다.
그 선봉에는 문화와 삶의 질에 있어, 구멍가게에 불과한 너무나도 절박한 자들이 자못 흥겨운 듯 춤을 춘다. 신기루(蜃氣樓)를 따르던 내일의 번성과 환상을 접기에는, 자신의 오랜 투자가 너무도 아깝기도 할 것이다.
노력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예산 불투명 전횡(專橫)의 모 교향악단 녹을 먹는 당사자가 이렇게 말한다. 문화를 망가뜨리는 일은 나의 연명 도구를 없애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마시오...
그녀의 공허한 독백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먹힐 지는 두고 봐야겠다.
그것이 먹힌다면 아직도 이 사회는 연명의 문제에 무감각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때까지는 각종 현란(眩亂)한 홍보의 기술이 통하는 사회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촛불이 수명을 다하기 전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단말마의 포효(咆哮)에 해당될 수도 있겠다.
인간 매 사람에게 지워진 부자유한 시지푸스의 신화는 인류사 내내 계속된다. 덧붙여 선장은 제일 먼저 도망한 세월호의 소망 없는 불투명한 망상(妄想)도 계속된다. 성경에서는 이런 현상을 노아의 때라 칭하기도 한다.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직시(直視)해야 한다. 세상은 온통 허황되고 허망한 망상에 쌓여 있다. 곳곳에 산재(散在)한 좀비들을 피해가야 비로소 목적(目的)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
웰빙코리아뉴스 2015.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