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휴 단체/Core University

할복보다 빠따...

Conductor 2010. 1. 28. 15:45

아침 일찍 서둘러 호텔 로비로 내려온 시각이 9시쯤...

지도자이신 성세진 교수, 이만옥 교수, 이옥화 교수, 최완식 교수, 이공주 교수 그리고 내가 오늘 여행의 일행이다.

가까운 전철역으로 가서 온천 대국 일본의 상징이라는 노보리베쓰를 향해 떠난다.

일본은 교통비가 대체적으로 비싸다.

그래서 일본인들조차 국내 여행이 어렵다고 하지...

마침 시간 때를 잘 맞추어 고속 특급을 타고 한 시간여를 달렸는데, 내릴 때쯤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노보리베쓰 역사를 나오려는데 거대한 곰이 발을 들고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한 기세로 우리를 맞는다.

북해도 설국이 피부에 와 닿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일행은 버스로 옮겨 탄다.

버스가 눈 쌓인 계곡을 돌아돌아 가는데 창가에 앉았던 나는 계곡의 아찔함에 움찔하기도 했고...

그런 길을 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의 제 속력으로 다니는 것도 신기했고...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왕성한 활약을 보였으나, 제자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 후 그 충격인지 결국 그 자신도 1972년 4월 16일 즈시 마리나 맨션의 집무실에서 가스로 자살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또한 유서가 없어 자살이나 동기도 알려지지 않아, 자신도 예측 불가능했던 충동적 자살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에 나타난 외형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극우파 제자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에서, 선생으로서의 일종의 자책이나 후유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아니 훨씬 이전시대부터 자살을 미화하는 전통이 내려오기도 한다.

특히 극우파들의 마지막 수단이기도 하고...

“나는 작품 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

하나 문학을 떠나 냉정한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저 환상과 현세를 구분하지 못하던 염세주의 문학가의 한계에 부딪친 절망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연히 환상은 허무로의 종점으로 귀결되니까...

그 허무로의 여행이 온통 눈으로 덮인 설국에서 정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짧은 서술로 독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노벨상 수상으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진 등정의 종결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하며 눈보라치는 지옥계곡을 휘넘어 가는데, 눈 쌓인 깊이가 엄청나 우리는 등정을 포기하기로 한다.

올라가던 초입의 남녀 도깨비가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온갖 허세를 떠는 곳을 지나자, 굉음이 들리고 다리 밑에서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장관을 보게 된다.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솟는다는데 우리 일행은 시간 때를 잘 맞추는가보다...

설국의 작은 식당에 들어서서 시마무라가 만난 고마코가 여기에도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늙은 아주머니와 젊은 청년뿐이라 미소 라면으로 점심을 마치고 그 유명하다는 온천으로 들어간다.

 

남탕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 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매표 직원이 건네준 수건을 들고 긴장했는데, 횅하게 넓은 남자 탈의실에서 중년 여성들이 활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미 예상하던 바이기도 하고 벳부에서의 유별난 경험도 있고 하여, 수건으로 중요부분을 가리고 탕 안으로 진입...

노천탕까지 나아가 눈발 휘날리는 속에서 담화를 벌인다.

눈에 관한 육담 등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초교부터 고교 시절까지, 이른바 일본 말로 빠따 맞던 이야기가 안주감이 되었다.

성세진 교수는 서울고 시절의 자이언트, 이만호 교수는 경기고 시절 역도부, 그리고 최완식 교수의 수업시간에 관한 야사는 나의 이야기와 흡사했고, 나의 휘문고 시절 밴드부 빠따와 종로 거리에서 경복고와 휘문고의 진검 승부 이야기 등등...

하지만 일행의 결론은 이것이었지...

뭐니뭐니 해도 종로 거리의 설익은 조폭 조직에서 단연 으뜸은 ‘중’ 자 들어가는 야간부 조폭이었다고...

 

밴드부 시절 트롬본 불던 한 친구 빠따만 맞으면 엉덩이를 붙잡고 밴드반 곳곳을 환성을 지르며 깡총깡총 뛰었는데, 그것때문에 선배들한테 몇 대 더 맞았다.

또 요령 없이 빠따를 쳐 척추를 다치는 예도 종종 있었고...

이 친구가 강직성 척추염 수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가 되어, 텔레비전의 명의 시간에 나왔는데, 나는 그 친구 빠따 맞는 것 보고 웃음보 터지던 것만 기억났었다.

순전히 나만의 추측이지만 그때의 빠따때문에 다시는 자신과 같이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어야겠다는 깊은 깨달음으로 척추수술의 일인자가 된 듯싶다. 후후...

그러니 할복보다는 빠따가 천배 만배 더 긍정적인 건 분명하고...

 

저녁 시간은 우리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세진 교수의 여주로의 귀촌이 주를 이루었고,

황토 흙벽돌로 지어질 찜질방 예약으로 일행은 온천여행을 마감하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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