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밤
2010년 1월 24일
엄청난 눈이 오고, 몇 십 년만의 혹한이 찾아와 연일 영하 18도를 오르내리며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국을 떠나며 생각합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 "설국"으로 유명한 북해도, 얼음과 눈의 도시 삿포로를 가기 위한 전초전이자 혹한기 훈련이라는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리며 여행에 만반의 대비를 했지요...
하지만 떠나기 전 삿포로의 날씨를 살펴보니 한국보다 도리어 춥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내친 김에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하고 인천공항을 떠납니다.
티켓팅 중 같은 이러닝 팀의 이옥화 교수로부터 메시지가 오는데, 비즈니스석으로 승급을 했으니 출국장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이옥화 교수는 아마 항공사들로부터 특별 대접을 받는가보다 생각하며, 동료 최완식 교수가 기다리던 라운지로 들어가 느긋한 아침을 했지요...
설국의 풍경은 말 그대로 하얀 눈으로 천지가 하얗게 보였습니다.
보이는 곳이 다 하얗고, 함박눈이 내렸다 조금 뜸했다 다시 싸락눈이 내리고, 또 눈이 내리고... 눈, 눈, 눈...
호텔의 좁은 방에 들어서니 썰렁합니다.
작은 캡슐을 옮겨놓은 화장실도, 기구도, 장도, 모든 게 작습니다.
짐을 풀고 일본 교수들과 저녁을 같이합니다.
음식과 정종, 맥주가 나오고 차츰 일행은 거나해져감에 따라 각종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구요...
우리 자리에서는 이만호 교수가 불을 댕겼지요...
음악을 좋아하시는 이 교수는 일본 교수들을 상대로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일본 교수들이 안다고 대답합니다.
이후 동방신기를 넘어 소녀시대, 원더걸스, 애프터스쿨 등등...
용모까지 세세한 탐구를 끝냅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눈꽃 축제가 벌어지는 오도리 공원을 산책 코스로 택하고, 눈 덮인 삿포로의 중심가를 향해 걷습니다.
도로까지 덮인 백설과 사방의 눈, 하늘에서 휘날리는 눈, 온통 눈 속을 거니는데, 건물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눈과 뒤섞여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냅니다.
얼음과 눈 조각은 한참 준비 중이라, 사진만 몇 컷 찍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지요...
이튿날,
홋카이도 대학 정문이 바로 우리가 묵는 호텔 건너편이라 아주 가깝습니다.
일행은 눈이 내리는 교정을 들어섰지요...
홋카이도 대학 교정은 상당히 넓은 것 같았어요...
선두 그룹을 따라 한참을 걷는데 후미의 우리 일행의 일본인 교수가 그쪽이 아니라 하여 “전체 뒤로 돌아” 가 시작됩니다.
사실은 일본이라 "빠꾸 오라이" 였습니다만...
결국 이 구호는 여행 내내 이어지고 말았지요...
세미나장에는 눈에 익은 명품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옷을 입은 채 있었구요...
가설무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연주회도 하는 곳으로 보였지요...
각자 자리를 잡고 전기 코드를 살펴보았는데 내가 앉은 쪽 코드는 단전 상태입니다.
할 수 없이 배터리에 의존하며 노트북을 폈는데, 이번에는 무선 인터넷 접속이 안 됩니다.
점심시간에 나만 안 되었나 해서 물었더니 다른 교수들도 안 되었다고 합니다.
대여섯 명만이 접속이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오후 세미나 시간이 시작되고, 나도 다시 컴퓨터를 켜고 시험 삼아 무선 인터넷의 서버를 이곳저곳 탐색하는데, 마침 접속이 되었다는 신호가 들어옵니다.
이후 느림보 인터넷마저 접촉이 끊길세라 조심하며 접속 상태를 유지합니다.
다른 교수들을 둘러보니 접속이 안 되었는지 강단의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어요...
은근한 희열을 맛보며 놀부 정신을 되새깁니다.
저녁 일본 측에서 내는 성대한 만찬을 향해 전세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는데 어찌나 함박눈이 소복이 내리는지...
도로는 눈으로 덮여 하얀데도, 차들이 요동 없이 제 속력을 내는 것을 보니 아마 타이어가 좋기도 하고, 운전자들이 이런 환경에 충분히 적응이 되었나봅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맥주, 흑맥주, 정종에 양국 교수들의 얼굴도 거나해지고...
코어 유니버시티 세미나 단짝이 된 최완식 교수와 충북대 의대 이영성 교수와 함께 음악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건국대 한선영 교수가 우리 식탁에 합석합니다.
한 교수는 대광 중고등학교에서 첼로를 했고, 오케스트라와 협연까지 하신, 반은 음악인입니다.
몇 년 전 건국대에서 나가사키 대학과 첼로 레슨 시연을 할 때 건국대 학장으로 있으면서, 오셔서 첼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구요...
서울시향에 계셨던 고 이인규 선생님의 제자로,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었던, 이인규 선생님의 첫째 아들 이승철씨와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이승철씨는 이인규 선생님의 대를 이어 현악기계의 원조이다시피한 현악사 사장으로 있구요...
또한 이승철 사장은 군대 시절 나의 조수였고, 동생 이승진씨는 첼리스트로 지금은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옛날이야기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는데, 백설 덮인 천지 위로 누렇고 희뿌연 가로등이, 하늘의 함박눈을 하얗게 하얗게 비추며 설국의 밤은 아쉽게도 깊어갔는데요...
이제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드는 교수들의 삶의 흔적들이 얼굴과 머리 곳곳에서 드러나고, 지난날의 되새김질은 거칠지 않은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던 설국의 밤이었구요...
평생 학문을 갈고 닦으며 후진을 양성하시다가, 몇 년 후 정년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는 노교수의 애증 어린 술주정도 내리는 함박눈에 덮여갔습니다.
그렇게 고요히 내리는 눈은, 인생사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갔지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